2010년 일본영화 ‘캐터필러’, 전쟁이 남긴 육체와 여성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심리 드라마. 영화 덕후 시선으로 깊이 있는 리뷰 정리.
1. 귀환병의 육체, 전쟁이 만든 괴물
『캐터필러』는 2010년 일본에서 개봉된 작품으로, 실험적인 영화로 평가받는 동시에 국내외에서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영화다. 이 영화는 평범한 전쟁 영화가 아니다.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의 계보를 잇는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작품답게, 『캐터필러』는 전쟁이라는 시스템이 인간을 어떻게 ‘도구화’하고, 또 그 결과로 남은 육체와 영혼이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중일전쟁에서 귀환한 일본 병사 ‘카토’와 그의 아내 ‘시게코’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카토는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잃고, 청력과 언어능력까지 상실한 채 귀국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영웅’으로 추앙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매우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승전국의 영웅’이 된 한 남자는 사실상 사람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은 존재이며, 그를 돌보는 여성은 그 영웅성 뒤편의 끔찍한 현실과 매일 마주해야 한다.
덕후 시선에서 보면, 『캐터필러』는 기존 전쟁영화들이 전쟁터에서의 고난, 총성과 피, 그리고 전우애를 중심으로 삼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 영화는 전쟁 이후의 삶, 그것도 돌아온 병사와 그를 간호하는 여성의 폐쇄적 관계를 통해 육체와 정신, 권력과 굴레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카토는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지만, 여전히 성욕만은 살아있다. 영화는 이 장면을 매우 노골적이고, 불쾌하게 묘사한다. 시게코는 그의 욕구를 채워줘야 하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영웅의 아내’라는 시선까지 감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명확하게 말한다. 전쟁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그 괴물은 꼭 살육의 현장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도 전쟁은 육체와 성, 그리고 여성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한 채 남겨놓는다.
2. 시게코의 시선 – 영웅을 간호하는 여성의 지옥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병사 카토가 아니라, 그의 아내 시게코(테라지마 시노부)다. 이야기는 철저히 그녀의 시점에서 이어지고, 관객은 그녀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영화의 불편한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시게코는 남편의 귀환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삶의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남편은 말을 할 수 없지만, 무언의 명령으로 그녀에게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고, 음식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치우는 일까지 그녀의 몫이 된다.
덕후로서 이 캐릭터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게코가 단순한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엔 억눌린 채 복종하던 그녀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분노와 혐오, 연민과 우월감을 교차적으로 드러낸다.
시게코는 병든 남편을 통해 권력의 새로운 주체가 된다. 그는 말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고, 완전히 그녀에게 의존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남자’로서 그녀를 지배하려 한다. 이 모순적인 관계는 영화가 가장 탁월하게 그려내는 지점 중 하나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시게코가 마을 주민들에게 남편의 상태를 ‘전쟁의 결과’로 자랑스레 말하며 내면의 굴욕을 억누르는 복합적인 감정선이다. 관객은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과 자기 합리화의 결과인지 헷갈리게 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캐터필러』가 단순한 피해자의 서사가 아닌 이유다.
3. 육체, 전쟁, 여성 – 정치적 상징의 완성
『캐터필러』는 단순히 개인의 고통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철저히 정치적인 영화다. 감독 와카마츠 코지는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한 뼈아픈 비판을 인간의 육체와 성, 권력의 은유로 담아낸다.
카토의 병든 몸은 ‘국가의 영웅’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전쟁의 민낯이다. 그는 총을 쏘고 적을 무찔렀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잃은 육체의 파편으로 돌아왔다. 그를 찬양하는 마을 사람들, 국가 시스템은 그 육체를 보지 않는다. 오직 훈장과 기록만을 소비할 뿐이다.
여기서 영화는 육체가 사라진 인간의 존엄, 혹은 존엄이 사라진 육체라는 이중 구조를 완성한다.
또한 시게코는 그런 병든 영웅을 돌보는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녀는 일본 사회 속에서 강요되는 여성의 순종, 헌신, 가정 중심의 가치관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그 가치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여성을 소모하는지를 보여준다.
덕후의 시선에서 가장 탁월했던 장면은, 시게코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이다. 그녀의 표정은 비극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쟁 이후의 삶, 국가와 개인, 여성과 육체, 현실과 허상의 극단적 대비를 가장 정제된 형태로 제시한다.
총평
『캐터필러』는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시각적으로도 불편하고, 정서적으로도 끊임없이 도전해온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본 전쟁영화가 보여주지 못했던 정치적 직시와 신랄한 인간 탐구가 존재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만든 괴물과 상처는 일상 속에서 영원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여전히 말없는 여성의 얼굴 위에서 반복되고 있다.
『캐터필러』는 전쟁, 육체, 여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역사와 인간을 가장 깊은 곳에서 응시하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