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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삭 속았수다 – 제주와 사람, 정서의 충돌

by nuar_insight 2025. 8. 4.

영화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의 미묘한 결 속에 담긴 인물의 상처와 사랑을 조화롭게 풀어낸 감성 회복극이다.

드라마 폭삭속았수다 포스터

1. 제주라는 배경, 감정의 파동을 품다

<폭삭 속았수다>는 단순한 제주 배경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다. 이 영화는 제주라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인물처럼 활용하는 작품이다. 바람, 바다, 언덕, 방언, 삶의 방식까지 모두가 주인공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장치로 작동한다.

영화는 제주도의 작고 느린 마을 '삼달리'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세련된 도시에서 무너진 채 돌아온 '조은혜'(신혜선)와, 삼달리에서 묵묵히 삶을 지키던 '조용필'(지창욱)의 재회는 단순한 옛 연인의 서사 이상을 품고 있다.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은 제주 방언으로 ‘완전히 속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삶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그 지점이다. 누군가는 도시에서 꿈을 좇다 삶에 배신당했고, 누군가는 섬에 남아 잊힌 삶을 견뎌냈다.

그런 점에서 제주는 배경이 아니라, 시간과 상처가 고이는 그릇이다. 특히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은 단순한 미장센 이상의 정서를 자극한다. 제주 사투리와 오래된 마을의 정서, 바닷가의 흐릿한 구름, 그리고 무심히 불어오는 바람은 관객에게 ‘나도 저기 있었다’는 감정적 동질감을 유발한다.

이러한 공간의 물성과 정서가 어우러지며, 영화는 제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귀향'이라는 보편적 서사를 감성적으로 풀어낸다.

2. 캐릭터가 살아 있다,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

이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은 캐릭터의 밀도와 디테일이다. 조은혜는 서울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어떤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인물이고, 조용필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제주를 지킨 존재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의 순수했던 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긋나며 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단순히 '재회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겪은 감정적 굴곡과 현실의 무게를 공유하며 변화해간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감정의 파도처럼 잔잔하면서도 끈적하게 스며든다.

조은혜의 친구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 모두 인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하는 듯한 생명력을 지닌다. 특히 할머니의 사투리 대사, 이웃의 뻔한 잔소리, 일상 속 시시한 갈등들까지도 리얼하게 다가오며 이 드라마의 공감 포인트를 높인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신혜선은 강한 척하지만 속은 부서져 있는 여성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지창욱은 한결같은 듯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복잡한 남성 캐릭터를 조용히 풀어낸다. 둘 사이의 케미는 과장 없이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다.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의 아픔을 함께 견딜 수 있을까?’라는 정서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3. 폭삭 속았던 삶을 다시 지키는 용기

<폭삭 속았수다>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 ‘속았던 삶을 다시 살아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한 번쯤은 ‘폭삭 속았던’ 경험을 한다. 관계든, 일든, 꿈이든, 혹은 자기 자신에게든.

이 드라마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위로한다. 폭삭 속은 줄 알았던 시간이 사실은 더 단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한 시간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완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다. 어긋나고, 상처 주고, 무너졌던 관계가 서로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미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에서 제주는 '도망친 곳'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된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복구 과정을 겪는지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순간은 거창하지 않다. 함께 우산을 쓰고, 쓴 커피를 나누며, 아무 말 없이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폭삭 속았수다’는 그래서 잔잔하지만 강한 울림을 남기는 영화다.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아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오래 남는다. 이 영화는 "속았어도 괜찮다. 다시 믿을 수 있다"고, 삶에 조용한 용기를 건넨다.